'컬럼&캐스트'에 해당되는 글 57건
- 2010/07/06 인터넷이 국민의 기본권이 되다
- 2010/06/30 남자의 눈물 (26)
- 2010/05/20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아닙니다! (4)
- 2010/05/11 딸랑 1표의 철학 (12)
- 2010/04/30 장수벤처만세! (8)
- 2010/04/13 KT의 로비가 붐빈다 (4)
- 2010/03/23 실리콘밸리가 만만한가? (14)
- 2010/03/11 SK Group의 중국공정이 안습인 이유? (16)
- 2010/02/28 손정의회장의 지름신 강림주기=월드컵싸이클 (6)
- 2010/02/23 이병철 vs 손정의 – 두 거인의 공통점은? (7)
지난 주에 두 명의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하루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는 서럽게 통곡을 했고, 다른 한 남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첫번째 남자의 울음은 아마도 이미 전국민이 함께 지켜 보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다시 얘기하기가 다소 저어하다. 하지만 그 남자의 울음이 아직도 짙은 잔상으로 남아 있기에 다시 떠올려 보고 싶다. 그 남자 ‘차두리’
8강의 문턱에서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는 ‘배터리 잔량’을 추호도 생각하지 않은 채 차두리는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추가시간으로 주어진 3분마저도 끝나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던 순간! 차두리는 그라운드에 누웠고, 누군가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졌고, 그 즈음에 시작된 울음은 급기야 거의 통곡으로 변했고, 지켜 보는 이들을 가슴 저미게 만들었다.
차두리선수는 늘 밝고 맑았다. 2006년 대표선수명단에 본인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때도, 그의 국가대표선발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는 얘기가 들릴 때도, 시중의 온갖 비아냥과 조롱과 개그소재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도 그는 늘 명랑하고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많은 신세대 선수들이 늘 얘기하듯이 월드컵본선을 ‘즐기는’ 마음에서 참여를 한 듯 훈련 때도 웃었고, 인터뷰 때도 웃었다. 그랬던 차두리가 통곡을 하였다. 비와 땀에 범벅이 된 유니폼 상의를 끌어 올려서 눈물을 훔쳐야 할 정도로.
그 장면을 보면서 미안함이 엄습해 왔다. ‘야 임마! 내가 차도 그 정도는 하겠다. 너는 왜 공은 안 보고 뛰기만 하냐? 도대체 위치선정이 그게 뭐냐?’라며 쏟았던 비난이 참으로 한심스럽고 민망스러워져 버렸다. 그의 울음이 16강에 멈춰선 대한민국의 축구에 대한 아쉬움을 다 가셔 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울음을 보면서 사람을 그냥 너무 내가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와 생각과 편견만을 가지고 대하면 절대로 안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차두리선수가 너무 고맙다.
또 다른 한 남자의 울음!
지난 25일 일본 동경에서는 있었던 소프트뱅크의 주주총회에서
2시간가량의 30년 계획 발표의 말미에
저는 무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하고 소중한 분입니다. 14살에 일본에 건너왔고, 14살에 결혼했습니다. 상대는 37살인 저의 할아버지. 그녀는 나의 할머니입니다.(이 때 할머니 사진이 올라 온다)
도중에 전쟁도 체험했습니다. 살아있는 것도 겨우 일 만큼 더러운 물을 마시고, 굶주림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오며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일본에서 한국국적으로, 말도 어눌하고, 아는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이 14살에 건너왔습니다. 14살은 아직 애지요. 중학생입니다. 혼자서 낯선 나라에 왔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중학생 때부터 가족을 경제적으로 책임지며, 열심히 일하신 분입니다.
매우 힘들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소주를 만들었고 돼지를 길렀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왔습니다. 그런 중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1957년에…제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조금은 살아갈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함석지붕의 너덜너덜한 부락의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의 호적은 사가현 *** 도로 無번지로 쓰여있습니다. 아무리 무번지라도 일부러 무번지라고 쓰지 않으면 좋을텐데…불법거주이기 때문에, 자기 땅이 아니라, 국철의 선로겨드랑이의 공터에 함석지붕에 판자를 붙여 살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3,4세 무렵 할머니가 저를 매우 귀여워해주었습니다. 매일 산책에도 데리고 가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집에 없었습니다. 나를 돌봐준 것은, 할머니였습니다. 매일 할머니가, ‘마사요시야(한국어로 야) 산보가자’라고 하시면, 나는 기뻐서 할머니를 따라갔습니다
할머니가 산책 갈 때는 리어카를 타고 매달려 갔습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무스름한 리어카가 미끄러집니다. 그 리어카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3개4개 쌓아두고, 거기에 기르고 있는 돼지의 먹이, 잔반이 같이 올려져 있습니다.
역전근처의 식당에서 잔반을 받아다가, 그것을 모아서 돼지 먹이로 씁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리어카를 타는 것만으로 즐겁게 갈수 있었습니다. 단지 어딘지 모르게 미끌미끌하고, 썩은 냄새 같은 게 나면서, 비 온 뒤에 울퉁불퉁한 길에서 웅덩이에서 미끄러지면 떨어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꽉 붙잡아라’라는 말을 들으며 매달려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날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지금 보면, 리어카 같은 것은 타고 싶지 않습니다. 창피합니다. 그렇지만, 그땐 어렸기 때문에, 아이였기 때문에, 별로 부끄럽거나 싫지 않고, 즐거웠습니다. 그 후,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할머니가, 아주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싫었냐면, ‘할머니 = 김치, 김치 = 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데 괴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별로 예를 들고 싶진 않지만….역시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참고로, 그의 전기에 보면 이지메를 수없이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런 괴로운 일들을 피하려면 역시 숨을 죽이고, 숨어있듯이, 일본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더욱 더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제 아버지가 피를 토해 입원을 했습니다. 가족의 위기였습니다. 1살 연상인 형은 고교를 중퇴하고, 울면서 지내던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의 입원비, 집안 써포트를 하는 어머니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미 주저 앉은 것 같은 가족의 위기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해야 될까…나는 그때, 사업가가 되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일시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가족을 유지시킬 수 있는 사업을 일으키겠다 라고 중학생 때 각오를 다졌습니다.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간은 함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료마가 간다’를 읽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주눅들어 우물쭈물하던 제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인종이라든지, 그런 사소한 것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 자체가 내가 작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업가를 목표로, 미국에 가자!, 미국에 건너가자고 결심을 합니다. 일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친구나, 선생님도, 모두가 말렸습니다. 할머니가 걱정된다며 가지 말라고 울고 울고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울었습니다. “가지 말아라,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무서운 곳에 가지 말아라, 가면 돌아오지 못하게 될꺼다”
하지만 나는 뿌리치고, 미국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보석’을 찾아오겠다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잡고, 일본에 돌아와 사업을 일으키겠다고, 반드시 가족을 지탱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친척아저씨, 아줌마, 사촌들에게도 만류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사요시, 넌 냉정한 녀석이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살지 죽을지 모르는 판에, 아버지를 두고, 혼자서 미국에 가다니, 너 자신만을 위해 가는 것이냐’ 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반박했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가족을 지켜내고 싶기에 가는 것입니다. 하는 김에 한가지 더 얘기한다면, 지금까지 제가 고민해온 국적이라는 것, 인종이라는 것, 똑같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간은 함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고 마음에 맹세 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서,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2주정도 한국을 돌았습니다. 할머니도 기뻐해주셨습니다. “마사요시, 네가 함께 한국에 가 보자고 해서, 겨우 한국에 가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두 명 이서 한국에 갔습니다.
전기도 아직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비옥하지 않은 토지라 사람도 적고, 양초를 켜고 먹는 식탁. 하지만, 모두들 촛불로 켠 컴컴한 식탁에서 새까만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아이들의 웃음은 바로 다른 사람 덕분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군가가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람을 원망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덕분이므로. 나는 회사를 시작한지 2년 만에 큰 병을 얻어 입원했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돈도 아니고, 지위나 명예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해준 것처럼 기뻐해주는, 넝마 같은 것에도 기뻐해주는…그런 일에 공헌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입원했을 때에 점점 더욱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어린여자아이 사진이 올라 옵니다.)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고, 이름도 모릅니다. 캄보디아인지 어딘지의 작은 여자아이가 흙 묻은 얼굴로, 사과1개를 받고,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언가
그렇게 공헌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저 단 한 명의 아이가 기뻐해주었으면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의 연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말로…
그의 울음을 해석하거나 평가하거나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 일인 듯 하여 굳이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본 최고 부호 중 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기업가 중 한 사람이, 2만 명의 부하직원들과 5백 개가 넘는 관계사의 대주주로 있는 한 사람이 그와 그의 회사의 30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눈물로 발표를 마무리 한 것은 그가 발표한 계획이 정말로 진솔하고 결의에 찬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는 사실만은 꼭 얘기하고 싶다. 그가 왜 트위터로 소통을 하는 것에 몰두하는지, 왜 회사 30년 계획을 전세계에 유스트림으로 생중계를 했는지, 그리고 왜 그는 울었는지는 2시간의 연설을 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그의 발표에 대해 어떤 일본 사람이 트위터에 올린 글인데 정말로 딱 적합한 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옮겨 본다.
얼마 전 창업투자회사 사장단 모임이 제주도에 있어서 참석을 했었다. 오랜 만에 뵌 반가운 분들도 있었고, 또 요즘 창업투자의 열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느낌도 있고 하여 다소 경쾌하고 즐거운 이틀간의 모임을 하고 돌아 왔다. 그런데 모임의 중간에 어떤 분이 ‘어이, 문대표! 소프트뱅크는 왜 한국기술투자 (KTIC)를 인수한거요?’라고 물어 오셨다. 그 동안 수 차례 똑 같은 질문을 지인들로부터, 또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심지어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받아 왔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저희가 아니거든요!’
2000년 초반부터 한국에는 2개의 소프트뱅크가 있어 왔다. 1991년에 설립된 소프트뱅크코리아가 모태가 되어 2000년 2월에는 소프트뱅크벤처스라는 창업투자사가, 2002년 8월에는 소프트뱅크커머스코리아라는 IT유통회사가 출범하였었다. 이 3회사는 일본소프트뱅크주식회사가 직접적으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며 지금 한국에서 소프트뱅크라는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는 회사들이다. 이 회사들과는 별도로 2000년 말 경에 ‘소프트뱅크파이낸스코리아’라는 회사가 설립되었었다. 이 회사는 본사인 일본소프트뱅크주식회사의 자회사였던 소프트뱅크인베스트먼트 (SoftBank Investment Corp, SBI)의 또 다른 한국 내 자회사로 설립이 되었으며, 주로 기술벤처투자를 제외한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투자 활동을 해왔다.
여기서 잠깐 SBI라는 회사에 대해서 알아 보자. SBI의 사장이었던 Yoshitaka Kitao씨는 90년대 중반에 근무하던 노무라증권을 떠나서 소프트뱅크그룹의 CFO로 재직을 시작하게 된다. Kitao씨의 역량과 노력으로

3년 전에 사석에서 한국기술투자 (KTIC)의 전 대주주였던 서모 회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나에게 ‘
한국에는 더 이상 소프트뱅크가 두 개가 아니다. 물론 소프트뱅크코리아의 자회사로 있는 소프트뱅크벤처스와 소프트뱅크커머스는 있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SBI Korea가 인수를 한 KTIC는 소프트뱅크와는 그 어떤 지분 관계도 인적 관계도 없는 회사이다. 다만, KTIC는 소프트뱅크코리아의 경쟁기업이자 혹은 우호적 공동투자자일 것이다. 원래 창업투자회사는 모두가 적이자, 모두가 동지이다. 투자를 위해 경쟁을 할 때는 적이며, 배짱이 맞아서 공동으로 투자를 하게 될 때는 동지가 되는 셈이므로. 많은 논란과 쟁송 끝에 KTIC의 대주주가 된 SBI Korea의 앞날에 늘 좋은 일들만 생기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 장면 1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지만 무심결에 받았다.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4년여 전 쯤에 투자를 받으려고 몇 번의 공식적인 미팅을 했던 사람이라고 자기가 우긴다. 이름은 살며시 기억이 난다. 그가 4년 만에 전화해서 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그의 가명을
엉클벤카: (조금 머뭇거리면서) 아 네, 잘 지내셨나요? 어떤 기술을 가진 회사인지 궁금하네요. 아무튼 먼저 간략한 소개서를 보내 주시면 저와 함께 일하는 심사역과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팅은 잡도록 하시죠?
엉클벤카: (많이 머뭇거리면서) 아 네, 그래도 우선 회사와 기술에 대해 알 수 있게 1페이지 짜리라도 좋으니 정리된 소개서를 좀 보내 주시면 보고 나서 바로 연락 드릴께요.
엉클벤카: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앞에 손님이 와 계셔서…바로 연락 드릴께요.
그리고 6개월 째 연락을 안 했다. 다시 연락이 오면 뭐라고 하지?
# 장면 2
전화벨이 울린다. 국제전화번호이다. 일본 본사일 확률이 높으므로 받는다. 역시 일본 본사의 자회사 중 하나인 소프트뱅크모바일의 부장이다.
나카무라부장: 오랜 만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완전히 일본식 말투다) 제가 회사를 하나 소개를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소개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엉클벤카: 아 잘 지내시죠? 네, 저희들이야 좋은 회사 소개를 받으면 너무 좋죠. 어떤 회사입니까? 한국에 있는 회사인가요?
나카무라부장: 아 네,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후배의 친구가 재일교포인데 그 사람의 선배가 이번에 회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 오셔서 함께 식사도 하고, 술자리도 했었는데 들어 보니까 괜찮아 보여서요.
엉클벤카: 연락처를 주시면 전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를 받아서 전화를 했다. 그의 가명을
엉클벤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지시를 받은 적은 없지만 아무튼) 네, 나카무라부장이 좋은 기술을 가진 회사라고 해서 궁금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엉클벤카: 네. 그럼 제가 사무실에 가든지, 아니면 저희 사무실에 오셔서 간략하게 회사 소개를 좀 해 주시겠어요?
엉클벤카: 그렇군요. 그럼 제가 나카무라부장하고 상의를 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에게 연락을 안했다. 최근에 몇 번
딸랑 1표뿐입니다
회사를 설립하면서 투자의사결정에 대한 논박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서 했었고, 그렇게 해서 결정하였던 원칙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그 투자의사결정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만장일치” “파트너 각자 1표”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의 수정이 있었다. 헌법도 고치는 것처럼. 예를 들면, 단독투자인 경우는 만장일치이지만 공동투자자가 있으면 (상대적으로 투자 리스크를 분담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3분의 2의 가결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1, 2차 투심위로 나누어서 결정을 할 때 1차 투심위는 심사역들 각자가 투표권이 있으며, 2차최종투심위는 심사역 그룹 전체가 1표를 가지게 하였다. 아무튼 결론은 대표이사인 저도 딸랑 1표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창업투자회사가 미국처럼 파트너기업 (LLC, Limited Liability Corporation, 유한책임회사)인 경우가 많지 않고 대부분 주식회사의 형태를 띄고 있다. 더군다나 소프트뱅크벤처스처럼 이른바 기업형창업투자사 (Corporate Venture Capital)은 파트너제도를 원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표이사가 있고 상명하복식 시스템도 많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을 읽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외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언급한 
벤처기업의 성공사례를 들어 보라고 하면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은 대부분의 사례를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찾아 낸다.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야후, 아마존, 이베이, 구글, 마이스페이스 그리고 페이스북 등등. 덧붙여서, 미국의 성공한 벤처기업들 대부분이 단시간에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NVCA (미국벤처캐피털협회)의 1999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벤처기업이 창업하여 상장에 이르기 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8.5년 이었다고 한다. 1994년부터 시작된 닷컴버블시기에만 한정하면 약 4.8년 정도가 걸려서 상장까지 이르렀지만 전체 평균은 그것보다 2배나 긴 셈이다. 작년 한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는 평균 11.1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적어도 10년 정도는 걸려야 기업이 공개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정부가 정한 규정에 따르면 일반기업인 경우에 창업을 한지 7년이 지나면 벤처기업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8년 째 되는 벤처기업은 도대체 무슨 기업일까? 벤처기업자격을 상실한 유사벤처? 혹은 벤처를 사칭하는 노령벤처? 지금부터 그 기준인 7년은 커녕 10년을 훌쩍 넘긴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지 못하는 ‘유사-노령벤처’ 몇 개를 만나 보자.
10년 넘는 세월을 오직 한길로
아래 3개의 회사는 뚝심과 열정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온 10년 넘는 장수벤처들이 다. 창업한 지 10년이 넘는 지금도 스스로를 벤처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 기업이며,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세월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벤처임을 자부할 그런 기업들이다.
1) iCube (대표이사
창업을 한지 16년이 넘는 초장수벤처기업인 아이큐브는 한국에서 보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지에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95년부터 디지털미디어솔루션의 지평을 열어 온 iCube가 지난 기간 동안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는 것. 그들의 기술과 제품은 항상 시장보다 4-5년 정도 앞선 것이었기에 막상 시장이 열리면 자금은 늘 메말라 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투자를 받아야 회사가 운영이 되는 벤처기업이다. 올해 초 미국의 CES에서 각광을 받은 이후에 회사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이제는 제발 1-2년 정도 앞선 제품으로 승부를 걸기를 바랄 뿐이다.
2) 한국전자인증 (대표이사
한국의 어느 누구도 인터넷전자인증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기에 창업을 해서 1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청년벤처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한국전자인증. 지난 십 수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겪어 왔지만 그래도 아직 이 회사의 대표이사인
3) 유웨이중앙 (대표이사
아마도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대학생이나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들은 대학지원을 하면서 이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대입온라인지원서비스를 시작한 지가 어언 12년이 넘는 또 하나의 장수벤처이다. 이 회사의
마라톤에만 사점 (Death Point) 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벤처기업도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1-2차례의 사점을 경험하게 된다. 거의 유사한 서비스인 아이러브스쿨은 좌초했지만 페이스북은 승승장구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점을 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위의 기업들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그 사점을 힘겹게 그리고 슬기롭게 이겨낸 장수벤처이다. 그럼 이 대목에서 왜 벤처는 그런 사점을 넘지 못하고, 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지 알아 보자.
1) 5년이면 정말로 장기투자?
최근 들어서서야 많은 벤처펀드들의 존속기간에 대한 자율성이 부과되고, 그 기간도 7년 정도로 늘어나고 있으나 2-3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른 벤처펀드의 존속기간이 불과 5년이었다. 5년의 존속기간 동안 벤처캐피털이 해야 할 일이 1) 3년 안에 조합자금을 죄다 투자하고 2) 남은 2년 동안 열심히 투자관리하고 3) 5년이 다 지나면 청산기간 1년 안에 투자한 지분을 모두 현금화시켜 조합원들에게 돌려 주는 것이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고수익/고위험/장기투자가 철학적 기반인 벤처투자의 호흡이 한없이 짧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5년짜리 조합을 운영하던 벤처캐피털은 자금이 메말라 가는 포트폴리오들을 시의적절하게 지원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사점을 넘지 못한 벤처들은 중도에 자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정부와 기관투자자들이 조합의 존속기간을 7년 혹은 그 이상으로 늘려나가고 있고, 이런 추세가 확실히 정착이 되었으면 한다.
2) 경험을 사라!
위에서 잔뜩 자랑하고 격려를 해 드린 세분과 그 회사에게는 잠시 죄송하지만, 장담컨대 장수벤처가 되고 싶어서 되는 벤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많은 청년들이 기업가정신의 충만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호기있게 창업을 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트리는 문제는 다름 아닌 ‘기업경영’의 기본기이다. 아이디어와 기술만 가지고는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금도 필요하고, 인사정책도 필요하고, 마케팅/영업도 필요하고, 시장개척도 필요하고… 이 모든 일들을 기업가 혼자 다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업가가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바로 함께 운명을 헤쳐 나갈 ‘동지’를 끌어 들이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장수벤처의 길로 접어 들지 않고 제한적인 자원(시간과 자금)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경험을 가진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야후의 티모시 쿠글 (Timothy Koogle)과 구글의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 이제 막 대학을 마쳤거나 혹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젊디 젊은 청년들이 창업한 야후와 구글의 수장으로서 두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주역들이다. 두 기업에 투자를 한 벤처캐피털이 소개를 하고, 젊은 창업가들이 마음을 열어서 받아 준 결과로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다 쏟아 내어서 거대벤처로 회사를 키워 내었다. 비록 한국에는 두 사람은 없지만 비슷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장기항전을 두려워 말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정쩡한 기간규제들을 파격적으로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벤처의 정의가 그들이 걸어 온 길의 기간에 있지 않기에, 10년이 지나도 혹은 30년이 지나도 생존해 있고 또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정신 자체가 벤처이면 되는 것이기에 과감하게 형식적인 규제들은 풀어 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의 자각, 다시 말하자면 
3주 전쯤 서초동 KT신사옥 (일명 올레캠퍼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과거 몇 차례 분당본사, 광화문사옥, 여의도사옥 등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나는 그날 서초동사옥에서 무척 당혹스러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당혹스러움의 이유는 빌딩의 세련됨이나 로비 옆에 있는 카페의 저렴한 커피가격, 혹은 출입시스템의 변신 그 어느 것에도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로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옥의 누군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이미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으며, 전반적으로 무척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그 산만한 분주함이 지금껏 잔상으로 계속 남아 있기에 오늘은 일본소프트뱅크 본사 로비의 지난 4년여를 반추해 보게 되었다.
소프트뱅크본사 로비는 늘 분주하다
2006년 봄, 소프트뱅크는 한화로 19조원 정도 되는 엄청난 현금을 투입하여 Vodafone K.K. (참고: K.K - Kabushiki Kaisha의 준말로 ‘주식회사’의 일본어 영문표기. 원래 영어로는 Co., Ltd.로 주로 표기)를 인수했다. 바로 이어 회사 이름을 SoftBank Mobile로 바꾸고, 과거 Vodafone K.K. 본사 사무실도 소프트뱅크본사가 있는 시오도메 (Siodome)로 이전하게 된다. 그 이전이 완료된 그 해 여름부터 시오도메사옥의 로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으며, 당시 사옥 11층은 약 50개 정도의 크고 작은 회의실로만 되어 있었는데 그 회의실을 예약하는 것이 큰 업무 중에 하나일 정도로 회의 공간도 늘 부족하였었다. 새로운 소프트뱅크모바일과 협력을 하고자 하는 많은 크고 작은 기업들의 방문이 줄을 잇던 시기였다.
그러나, 1년 정도가 지나자 그 소란스러움도 점차 잦아들게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어서 안정된 관계가 유지되어서일까? 하지만 번호이동성제도의 시작과 더불어 소프트뱅크모바일이 내세운 전략 중에 주목을 받은 것은 이른바 화이트플랜으로 유명한 요금전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것은 무슨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픈 구석이 있지만 문제의 원인은 철저하게 내부에 있었다. 원래 Vodafone K.K.는 Vodafone이 인수하기 이전에는 J-Phone이라는 회사였으며, 그 회사는 민영 JR (일본최대철도회사)의 관계자회사였다. 즉, Vodafone의 인적 구성의 대부분은 이른바 공기업출신이었던 것이다.
업의 본질로 따지자면 통신업은 혁신을 통신사업자 스스로 일구어 낸 적이 거의 없는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구성원들의 특징이 공기업적인 사고방식과 업무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인수 후 1년 정도까지의 소프트뱅크모바일은 말하자면 회사 이름과 대표이사 (
이동통신회사의 자산은 기본적으로는 주파수다
애당초 이동통신회사가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파수라는 공공의 자산을 일정기간, 일정비용을 지불하고 소유를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사업전개를 위한 갖가지 준비를 하게 되고, 설비와 단말이 준비가 되면 서비스를 하게 된다. 따라서 통신회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아무 것도 없다. 장비도 다 구매를 하는 것이고, 단말기도 제조사가 만들어 주어야 하고, 각종 부가서비스 또한 수 많은 기업들의 제안을 통해 수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신회사가 가져야 하는 원칙적이고 기본적이고 바람직한 태도는 한마디로 ‘Open-mind’로 철저히 무장된 긴 안목의 ‘Partnership’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통신기업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간에 대부분의 이통사는 공공의 자산인 주파수를 손에 거머쥔 공룡대기업이었을 따름이었다. 어떤 한국의 소프트웨어기업이 일본의 NTT Docomo에 납품을 한 적이 있는데 최종 의사결정 후 납품까지 6개월이 더 걸린 이유가 26명이나 되는 유관부서 본부장의 협조싸인을 받아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룡도 그것 보다는 조금 더 빠르지 않았을까? 협업과 상생을 위해서, 그리고 점차 다양해지는 통신소비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속도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통신기업의 귀와 눈과 마음은 한 없이 크게 밖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올레 KT가 아니라 오오오오오올레레레레레 KT를 바란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많은 분들이 최근 KT 의 변화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전에도 KT와 함께 일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신 분들이 하는 얘기인지라 그 ‘호감’에 대해서는 ‘공감’을 보내는 바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이석채회장이 계신다. 이석채회장 취임 이후 약 1년 남짓의 KT의 변화는 그 이전의 변화의 폭을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인 듯 하다. 그리고 그 변화를 더욱 더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새롭게 등장을 하였으니 이른바 아이폰의 열풍이다. 모르긴 해도 KT가 창사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논란과 화제의 중심 (그것도 거의 대부분 긍정적인 시각으로)에 서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아무튼 올레캠퍼스의 로비가 붐비듯이 전반적으로 KT는 붐비고 있다. 그리고, 그 분주함과 오고감이 지속이 되었으면 좋겠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아직도 소비자들은 올레KT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아니 어쩌면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변화가 올레KT의 성공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아이폰 열풍으로 인한 제휴와 협력관계의 새로운 진전에 불과하다는데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하지만, 혁신과 변화를 하면 모든 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KT가 그 행보를 멈추지 말고 지속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그래서 오오오오오올레레레레레레 KT가 되시길…
작년에 실리콘밸리에 대한 포스팅을 통해 (한국벤처가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의 벤처기업가들이 지닌 환경적 제약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여전히 그 아쉬움은 유효하며, 상상의 욕구는 또한 안타까움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은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실리콘밸리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추앙과 숭배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내어 보고자 한다.
지난 이십 여 년간 한국의 IT산업생태계에 얽혀 있는 많은 사람들은 틈만 나면 실리콘밸리 발(發)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감탄하고, 흥분해 왔으며, 그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1990년 전후로 반도체와 컴퓨터가 주된 뉴스의 소재였을 때 싹이 돋아 났던 애정은 1997년 이후 인터넷 버블 때는 거의 광란의 사랑을 하는 듯 하더니, 버블이 정리되고 새로운 질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 웹 2.0을 중심으로 한 실리콘밸리의 역동성에 대한 몽환적 짝사랑은 여전히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인텔, 썬마이크로, 실리콘그래픽스, 시스코, 어도비 등 90년대 초반 기업들로 시작되어, 네츠케이프, 라이코스, 야후, 지오시티즈 등의 닷컴버블의 주역들에게 관심을 쏟아 붓더니만 이제는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리서 흠모하고 있는 구글을 비롯하여, 최근 들어 이름 조차도 생소한 수 없이 많은 Social Something Company들을 향한 사랑의 주문을 매일같이 외우며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의 힘이 너무 커서일까? 변심한 애인을 대하듯 한국의 벤처생태계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무관심 혹은 비관적인 비난을 툭툭 내 던진다. ‘한국 인터넷은 <포털>의 제왕적 독점으로 인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말들만 무성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맞는 말도 아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는 미국도 (아니 실리콘밸리도) 사실 여전히 야후와 같은 포털이 위력을 지니고 있고, 전자상거래 시장은 이베이가 다 먹어 버렸고, 검색이라는 말은 완전히 구글과 동의어가 되어 가는 상황이고, 네트워킹서비스는 페이스북에 의해 점령이 끝난 상태로 분야별 과점적 현상이 심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도전하는 자들이 있는 것인지를 반문해 보면 ‘꼭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다. 혹은 반대로, 앞서 말한 거대인터넷기업들이 소규모 스타트업들과 상생하거나 혹은 좋은 매수자가 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굳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IT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하면, 특히 인터넷이나 웹과 관련된 사업을 하면 무조건 성공을 할 수 있고, 그 성공의 끝자락에는 구글이든 아마존이든 이베이든 심지어는 다 망한 줄로 아는 야후까지 나서서 회사를 좋은 가격을 주고 사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면,
숫자를 통해서 검증을 해 보도록 하자. 미국의 NVCA (http://www.nvca.org/ 미국 벤처캐피털협회)에 등록된 창업투자회사가 최근 업데이트 된 바에 따르면 426개이다. 시장전문가들에 따르면 협회에 등록 안된 창업투자회사가 그 보다 2배 정도가 된다고 하니 적어도 미국에는 1천2백 개 정도의 창업투자회사가 있다. 그 중 경제위기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는 창업투자회사는 약 400개 정도가 된다고들 한다. 아주 보수적으로 봤을 때, 그 400개의 창업투자회사가 지난 10여 년간 투자한 기업은 회사당 평균 100개 정도 될 것이다. 시장 평균보다 많은 예를 들어 보면, Draper Fisher Jurvetson 같은 창업투자회사는 현재 포트폴리오 숫자가 260개나 된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투자를 집행한 숫자는 적어도 그것의 3배가 될 터이니 700개가 넘는 기업에 투자를 한 셈이다. 분야를 집중해서 투자를 하는 것이 장점인 Mohr Davidow Ventures의 경우를 보자면, 지금 현재 포트폴리오가 56개 정도이고, 지난 10년간 120여 개의 기업에 투자를 하였다. 아무튼 이런 가정을 따라서 결론을 내려 보자면, 10년간 미국의 창업투자회사가 투자를 한 기업은 어림잡아 40,000개이다. 그 중에서 실리콘밸리를 거점으로 하는 기업이 60%가 넘는 수준이니
이럴진대,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기가 쉬워 보이는가?
환경을 탓할 시간에 시장을 더 연구하고, 이미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선발주자들을 욕할 시간에 경쟁전략을 더 세밀히 가다듬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소주잔 기울일 시간에 조금 더 면밀하게 마케팅전략을 고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미 과점적인 지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허구한 날 욕을 먹고 있는 네이버, 다음 등등의 포털과 다른 나라 기업에 팔아 넘기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 기업인 옥션과 지마켓, 그리고 절대적 세계지존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인터넷게임기업들의 업력이 결코 길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다지 만만하지가 않아서 앞으로 5년 혹은 10년 후에는 어떤 기업이 그 지위를 대신하고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불과 7-8년 전까지 야후가 지금의 이런 초라한 모습이 될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었듯이. 즉, 어디서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을 하기 위해서’를 알고 시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약 20개가 넘는 미국의 선도적인 창업투자회사들이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중국에 지사나 지점, 혹은 현지 파트너들을 만들어서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실리콘밸리 찬가를 부를 시간도, 여유도 없지 않을까? 그러니, 그게 계곡이든, 골목이든, 단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1세기는 점점 노쇠해 가는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구로디지털단지가, 대덕밸리가, 혹은 새롭게 등장하게 될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열정적인 기업가들의 건투를 빈다! 세상의 중심에 설 그날이 올 때 까지!
버진모바일 (Virgin Mobile)에게 경영권을 넘겼던 SKT의 미국 내 MVNO Service인 힐리오 (Helio)가 올 5월 25일에 완전히 사업을 중단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이미 2년 전에 매각을 하였기 때문에 이 소식이 더 이상 SKT관계자들의 가슴 아프게 하지는 않을 터이나 그래도 아스라한 쓰라림 정도는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힐리오를 버진모바일에 매각할 즈음에 비단 힐리오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대부분의 MVNO Service가 경영난에 빠져 있었고, Amp’d Mobile, Mobile ESPN, Disney Mobile 등 선두주자들도 아예 사업을 포기하는 등 쉽지 않았던 환경이었기에 상대적인 아픔은 다소 적지 않을까?
5-6년 전, MVNO 서비스의 미래를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 본 많은 시장예측전문가들은 MVNO가 비디오대여 시장의 명암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었다. 중소규모 동네 비디오대여점이 난무하던 시기에 등장한 Blockbuster와 Hollywood Video가 시장을 깔끔하게 재편하여 승자독식의 시간을 누린지 불과 10여년 만에, 지금은 그들 마저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듯이…물론, MVNO의 좌절과 몰락의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듯 하기도 하다. 아래 그림은 힐리오가 사업 출범시기에 공개적으로 발표한 사업전략의 마지막 페이지이다. 계획대로라면 2009년 이후부터는 완전 대박이 났어야 하는데, 결과는 3,200억의 투자금을 날렸고, 가입자는 고작 20만명 수준이었다.
힐리오를 매각할 당시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SK의 고위임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 다시 해외진출 따위는 꿈도 꾸지 말고 한국에서 통신사업, 기름사업이나 잘 하자’, ‘역시 미국시장은 쉽지 않군, 그러니 만만한 아시아시장이나 먹어 보자’, ‘도대체 MVNO를 하자고 한 사람이 누구야? 말도 안되는 사업을 구상해서 왜 이런 망신이야!’, ‘앞으로 해외시장은 철저한 시장분석을 더 하고 철저한 ROI분석에 더 힘을 기울이자’ 등등의 회한과 반성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시각을 살짝 다른 곳으로 돌려서 진출과 매각 당시의 시장의 반응은 어땠을까? 시장의 반응을 가장 객관화시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주식가격이 아닐까 싶어 한 번 확인을 해 보니 힐리오를 시작했을 때도, 혹은 매각을 했을 때도 시장의 반응은 심드렁한 편이었다. 2006년 5월 초 힐리오 서비스 개시일의 종가 231,500원 (시가총액 18.7조)였고, 2008년 6월 말 지분을 매각한 날 종가가 191,000원 (시가총액 15.4조)이었다. 서비스개시일에 즈음하여 중국의 China Unicom 지분 참여건이 동시에 주가에 영향을 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을 터이므로 힐리오의 시작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밋밋했던 셈이고, 오히려 사업의 철수는 주가에 안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한마디로 리스크의 해소!
2010년 새해 벽두에 SK그룹이 엄청난 규모의 핵심인력을 투입을 해서 중국전략을 새롭게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중국시장을 공략해 나가는 것에 그룹의 미래를 걸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SKT 소속 임원들을 비롯한 그룹의 많은 핵심 인재들은 이미 중국으로 건너 가서 전략을 짜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 대목에서 갑자기 나는 힐리오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일까?
기업가들의 수 많은 도전들이 그 해당 시기에는 무모하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이병철회장의 반도체신화도 그랬고, 그 훨씬 이전에
예측이 완벽하게 틀리기를 진정으로 바라지만 위의 신화들을 SK의 중국공정의 경우와 견주어 보자면 너무 미안하게도 SK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신화 창조자들의 업적과 행로에 비추어 보자면, SK Group의 중국공정의 최전면에는 그룹의 총수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이 진두지휘도 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리 엄청난 역량을 가지 천재적 인재들을 중국 전역에 배치해서 머리를 싸매고 전략을 짜낸다 하더라도, 아무리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붓는다 하더라도 결과는 뻔할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 현지에 투입된 사람들의 역량과 자질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고, 분명 그 인재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세련되게 다듬어진 전략을 조만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 전략적 대안들을 들여다 보면서 힐리오의 실패를 떠올리고 결단을 주저하게 된다면 그 전략들은 그저 종이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가장 훌륭한 전략을 선택을 해서 추진을 하게 되더라도 그 집행을 명석하고 뛰어난 임원들에게 내 맡기고 총수는 나중에 평가하겠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그것 또한 실패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SK Group 처럼 훌륭한 기업의 훌륭한 인재들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가진 절박감 혹은 열정이 문제이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을 지배하는 생각의 중심은 힐리오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아님 말고’ 정신이 자리잡고 있을테니, 총수가 그야말로 '운명'을 걸고 나서야 성공의 문턱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아주 얄밉게 일본에 계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략실행의 성공요인의 핵심은 리더의 안목과 실행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똑똑하고 열정적인 임원들의 에너지 낭비시키고 좌절감과 낭패감만 안겨주지 말고 총수가 직접 나서서 해답을 찾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에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면 완전 죄송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서) 왜 아까운 블로그 지면 낭비하면서 남의 살림살이, 허물을 비난하는 것에 몰두하는거냐고? 안타까워서 그렇다. 너무 안타까워서…한국의 최고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SK가 힐리오 정도 실패했다고 위축이 될까 봐 안타깝고, 또 그런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반복하여 실패를 할 것 같아 안타깝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기순환의 주기를 이론화시키기 위해서 무던하게도 애를 써 왔으나 대부분의 경기순환이론들이 결과론적인 해석이 많은 터라 거시경제 예측에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론들도 간혹 그 이름을 날리곤 한다. 오늘은 비록 그 어떤 경제학적인 검증이나 모델로도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바로 검증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완벽한 비주류이론인 ‘
1994년 미국월드컵 (한국의 전적은 2무1패로 예선탈락, 무적함대 스페인과 아쉽게 비김)
90년대 초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약진의 시기에 일본에서 Windows 관련 제품의 유통을 통해 소프트뱅크는 탄탄한 실탄을 마련하게 되고, 이어서 정보의 흐름을 장악하는 자가 결국 세상의 부를 장악한다고 믿어 왔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의 전적은 1무2패로 예선탈락, 네덜란드의 히딩크를 대면하게 됨. 5대0으로)
Dotcom Bubble이 정점을 향해 도움닫기를 하던 시기였다. 1996년 야후에 투자를 한 이후 본격적인 미국의 닷컴 사냥을 모색하던 중, 1998년부터 대규모의 자금을 본격적으로 벤처펀드에 출자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Mobius Ventures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당시 Softbank Venture Capital이라는 창투사를 지원하여 거의 1조가 넘는 돈을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하여 그 창투사를 통해 수 많은 실리콘밸리 중심의 닷컴벤처들에게 투자를 한다. 덧붙여서 야후 재팬의 합작 성공에 탄력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Mr. Joint Venture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실리콘밸리에 투자를 한 많은 벤처기업들의 아시아 진출 (특히 일본 시장 진입)을 합작법인 형태로 이끌어 나간다. E*Trade Japan, CarView Japan, GeoCities Japan, VeriSign Japan 등등 엄청난 숫자의 'XYZ' Japan 을 설립하게 된다. 그 많은 합작법인들의 지금 현재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의 전적은 4강! 행복한 여름이었다)
2000년 Dotcom Bubble의 허망한 붕괴 이후,
2006년 독일월드컵 (한국은 1승1무1패로 아쉽게 16강 진출 좌절, 스위스 미운나라)
월드컵 본선이 개최되기 석달 전!
2010년 남아공월드컵 (이제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자! 올해도 월드컵이 열리는 해이며,
그러나 저러나, 2010년 남아공에서 한국은 16강에 진출할 수 있을까?

지난 2월 12일은 여전히 한국경제의 거인으로 남아 있는 호암 이병철회장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 즈음에 그의 업적을 기리고, 또 재평가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삼성그룹 내 뿐만이 아니라 학계나 언론계에서 다양하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삼성그룹과 이병철회장의 ‘한국현대사’에서의 입지에 대해서는 왈가왈부를 할 사람들은 무척 많을 듯 하지만, 지금 현재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늘 명암이 있는 법이니까…하지만 오늘은 호암
삼성전자가 이른바 글로벌전자기업의 절대강자였던 소니를 이겨내기 시작한 것도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소니는 아날로그시대를 정복했던 전자기업이었으나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군주의 자리를 삼성전자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삼성전자를 먹여 살리는 것은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디스플레이, 모바일기기, 심지어는 아날로그였던 TV까지 삼성이 만드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디지털이다. 이 디지털의 중심에 바로 반도체가 있다.
1980년 그 혼란하고 어수선했던 한국을 잠시 떠나 일본에 체류하면서 호암은 많은 전문가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 하나였던 한 미래예측전문가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게 된다. ‘일본이 살 길은 컴퓨터, 반도체, 신소재, 광통신, 우주공학, 해양공학, 유전자공학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어떻게 성장시켜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을…일본이 살 길과 한국이 살 길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이를 들은 호암은 그 이후 3년이 넘는 연구, 조사, 자문의 과정을 거쳐서 결단을 내리게 된다. <호암자전>이라는 책에는 그러한 과정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반도체산업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과연 주위의 반응을 어떠했을까? 감히 예측하건대, 모든 임원들이 처음에는 목소리를 내어서 반대를 했을 것이고, 막상 기흥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을 때는 반대의 의견을 입에서 우물거렸을 것이고, 사업을 시작한 1984년부터 4연 연속해서 손실을 보았을 때는 머리 속으로 반대를 했을 것이다. 그 반대논리의 중심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아마도 반대를 했던 사람들은 지극히 분석적이고 이성적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세계반도체시장은 딱 두 나라가 점유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미국과 일본! Intel을 비롯하여, Texas Instruments, National Semiconductor, Motorola, IBM 등등 당시에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국의 절대강자들과 일본의 Toshiba, Hitachi, National, Sanyo, Sony, Sharp, Epson 등의 기업들 면면이 죄다 감히 한국의 제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던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시장에 후발주자로 남들 하는 것 베껴서 승부를 내고자 전력투구를 하겠다고 나선 호암의 결단에 찬성을 할 이성적인 임원들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요즘 말로 이른바 레드오션 (Red Ocean) 도 그런 레드오션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호암은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서 결단을 내렸고, 그의 경영철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실행’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막대한 적자 행진의 마지막 해인 1987년 11월에 영면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삼성은 지난 24년간 그야말로 일취월장을 이룩하게 된다. 지난 달 CES에서
호암과 아주 비슷한 행보를 하고 있는 사람이 현해탄 건너 일본에 한 명이 있는 듯 하다. 바로 소프트뱅크의
그가 지난 2006년 일본의 3위 이동통신사업자인 보다폰재팬을 자그마치 19조원의 돈을 주고 인수할 때 (그 중 80%가 넘는 인수자금을 차입으로 조달)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꼴찌인 보다폰재팬이었고, 꼴찌이다 보니 네트워크에 투자를 점점 못하게 되어 통신의 품질은 꼴찌에 걸맞게 나빴고, 브랜드 가치도 저렴하기 그지 없었고, 더군다나 2위인 KDDI의 약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일본이동통신시장은 이미 고도로 포화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믿었던 그 즈음에…
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소프트뱅크모바일(인수 후에 사명을 변경)은 여전히 꼴찌이다. 하지만 사뭇 지위가 다른 꼴찌를 하고 있다. 아직도 이용자 숫자에 기반한 시장점유율은 꼴찌이지만 성장률, 번호이동성과, 통화품질, 데이터 사용률을 비롯하여 각종 재무지표가 1등의 지위에 올라가 있다. 많은 임원들이 5년 전 보다폰재팬을 인수할 당시 회의적이었고, 시장전문가들과 주식시장에서의 애널리스트들은 심각하게 소프트뱅크의 몰락을 예견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