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 (Underdog)은 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
축구의 본고장 영국(영국 프로축구의 최상위 리그는 English Premier League이다. 이하 EPL)에서 시즌 중반을 지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돌풍을 일으키는 팀이 있습니다. 전통 강호인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첼시, 맨체스터시티, 아스날, 리버풀 등이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1부와 2부를 전전하다가 이번 시즌 라니에리 감독이 부임한 이후 1위로 부상한 ‘레스터시티(Leicester City)’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레스터시티는 작년에 1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대대적인 선수 보강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영국의 한 도박회사에서 발표했던 레스터시티의 우승배당률은 5,000 대 1였습니다. 우승 후보들의 배당률이 대체로 10 대 1 수준인 점을 감안한다면 레스터시티의 우승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PL에서 약팀들이 시즌 초반에 반짝하고 무섭게 치고 올라오거나, 단기 컵대회(FA컵등) 에서 우승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즌에 38경기를 치러야 하는 정규리그 일정 상, 스쿼드(각주**)가 약한 팀은 핵심 주전이 부상을 당하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이내 시즌 중반부터는 순위가 곤두박질치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에 박싱데이(각주***)를 지나 시즌 후반이 되어서도 1위를 유지하는 레스터시티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스쿼드: 운동을 하거나 경기에 참여할 때 하나의 유닛이 되는 선수 그룹
***박싱데이: 영국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을 공휴일로 지정함. 박싱데이라는 용어는 과거 유럽의 영주들이 이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상자에 담은 선물을 전달한 데서 유래함. 관중과 팬들은 휴식을 즐기는 사이 축구선수들은 주중경기까지 하면서 시즌 중 가장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함
거대 자본이 장악한 EPL에서 빈약한 스쿼드와 부족한 자금력으로 고군분투하는 레스터시티는 마치 거대 기업들 사이에서 이제 갓 사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도 맹활약하고 있는 스타트업의 모습과 레스터시티는 사뭇 흡사해 보입니다. 하위권을 맴돌던 레스터시티가 불과 1년만에 리그 후반으로 가고 있는 지금도 당당하게 EPL 1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레스터시티의 전략 혹은 강점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타트업의 필승전략을 레스터시티의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 통념과 상반된 역습위주의 전술
현대 축구는 패스를 통해 볼 점유율을 높여가면서 짜임새 있는 빌드업(Build-up)으로 공격을 구사하는 동시에, 공격수를 포함하여 선수 전원이 수비에 가담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각 포지션마다 체력이 탄탄하고 발재간이 좋은 선수를 다수 보유할 수 있는 강한 팀들에게 무조건 유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레스터시티가 보여주는 공격은 롱 패스에 의존하여 역습을 지향하는데, 이는 현대 축구계의 통념과 상반되는 파격적인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공격수들에게는 절대로 수비에 가담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소위 ‘뻥 축구’를 지향하고 있지요. 아래 비교표를 보면 볼 점유율과 패스 정확도가 다른 팀들에 비해 확연하게 열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16 시즌 레스터시티와 Big 4와의 볼점유율, 패스수, 패스정확도 비교]
출처: http://www.bbc.com/sport/football/35553082
[역대 EPL 1위의 패스정확도, 점유율 추이]
출처: http://www.bbc.com/sport/football/35553082
상대방이 공격할 경우, 레스터시티는 수적 우위를 가져가기 위해 공격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가 자기 진영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편도 결국 수적 우위를 맞추기 위해 공격에 상대적으로 많이 투입할 수 밖에 없으며, 이렇게 생긴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역습을 합니다. 말은 쉽지만, 이렇게 ‘모 아니면 도’ 전략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팀이 가진 가장 강력한(그리고 유일한) 공격수인 ‘제이미 바디(Jamie Richard Vardy) ’라는 선수에게 배팅했기 때문입니다.
‘제이미 바디’는 아마추어 7부 리그에서부터 축구와 공장 일을 병행했던 선수로 이전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을 한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를 맡았던 감독들은 보지 못했던 엄청난 장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EPL 최고 단거리 기록 보유자(35.44km/h)였던 것이지요.
올해 새로 부임한 라니에리 감독은 레스터시티의 부실한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심했고, 어설프게 기존의 전술로 경쟁하기 보다는 오히려 패스 성공률과 볼 점유율은 완벽히 포기하고, 본인들의 제한된 자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역습 위주의 새로운 전술을 수립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난 시즌 35경기 4골로 부진했던 제이미 바디가 EPL 역대 최다 연속골(11경기), 최다득점(19골, 토트넘의 케인과 공동 1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팀 역시 가장 많은 골을 기록 중에 있습니다.
[레스터시티의 스타일]
출처: Sky SPORTS
[스타트업을 위한 교훈 1]
스타트업도 기존 기업들과 경쟁하기에는 자본, 인력, 인지도 등 모든 면에서 불리합니다. 스타트업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경쟁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다 잘하겠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꼭 이것 하나 때문에 우리를 찾게 되는 그 무엇을 확보하기 위해 집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원천적인 경쟁력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아주 날카롭고 뾰족한 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회사의 장단점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때로는 포기하기 힘든 부분도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던져 버리고 가장 차별화할 수 있는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 체계적인 부상 관리
레스터시티는 현재 시즌 중 부상이 가장 적고, 선발진들의 변화가 거의 없는 팀 중에 하나입니다. 선수층이 얇은 팀이 여전히 선두를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핵심 선수들이 체력 저하 없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은 그저 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만큼 구단의 철저한 관리, 선수들 컨디션 유지를 잘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선수가 한번 부상을 당하면 본래 컨디션으로 회복되기에는 시간이 매우 걸립니다. 심지어 다시는 원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는 부상을 당한 선수뿐만 아니라 함께 손발을 맞췄던 동료들의 경기력에도 즉시 영향을 미쳐 부상은 팀의 전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치명적인 요소입니다.
이를 두고 2월 17일 영국의 ‘BBC’는 ‘각 팀들의 부상에 따른 결장일, 부상 횟수, 부상 선수를 분석했는데, 레스터시티는 개막 이후 9명의 선수만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20개 팀 중 두번째로 낮은 수치입니다.
[각 팀들의 부상에 따른 결장일, 부상 횟수, 부상 선수수]
EPL의 1군 스쿼드가 25명인 점을 고려할 때, 대다수의 선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는 꾸준함이야 말로 팀이 한 두 번 패배하더라도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부상이 가장 적은 ‘왓포드 (Watford Football Club)’도 작년에 비해 크게 선전하고 있고, 핵심 주전들의 상당수가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는 맨체스터시티와 리버풀, 맨유 등이 작년에 비해 고전하는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위한 교훈 2]
스타트업들도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점에서 대체선수가 부족한 레스터시티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부족한 인력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단기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 나가 자빠지는 (Burn Out)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팀원들이 Burn out되어 도중에 지쳐 쓰러지지 않고, 팀워크를 유지하면서 최대의 성과를 발휘할 수 있는 항시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균형감이 필요합니다.
- 핵심인재 발굴
이들은 핵심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하부리그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던 유망한 선수를 영입하여 그들만의 색깔을 입혔습니다. 공격의 핵심인 제이미 바디는 영국 2부리그에서, 제이미 바디의 활약에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드리블 능력과 스피드 또한 빠른 리야드 마레즈는 프랑스 2부리그에서 뛰던 선수를 영입한 케이스입니다.
레스터시티는 메시와 호나우도를 영입할 돈이 없습니다. 다른 팀에 간다면 핵심 인재가 아닐 수 있었던 선수를 그들의 장점이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팀에 성공적으로 융화시켜 핵심 인재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제이미 바디]
[스타트업을 위한 교훈 3]
스타트업도 메시와 호나우도급의 인재를 영입할 자원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큰 규모의 투자를 받게 되면 실력 있는 개발자와 프로젝트 매니저, 디자이너 등을 뽑겠다는 생각보다는 설립 초기부터 인적 역량을 가장 중심에 두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우리 회사만의 드림팀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혹은 향후에 내부에서 육성하고 발굴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등을 사전에 강구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회사에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정하고 당장은 훌륭한 복지와 고액 연봉을 줄 수 없더라도 우리와 ‘도전’을 함께 헤쳐나갈 능력자들을 찾으십시오. 마지막으로 그들이 왜 우리 회사에 와야 하는지를 설득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잘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 감독의 용단
레스터시티가 작년과 비교해서 결국 무엇이 달라졌는지 하나만 꼽자면 바로 라니에리 감독일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전술의 변화, 선수단 관리, 핵심 인재 육성 등은 결국 감독의 손끝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종목 중에서 축구는 감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종목에 속합니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1:1에서 게임이 시작되기에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있는 데에 비해, 축구는 조직이 중심이 되는 게임입니다. 그만큼 스타 한 두 명이 추가되거나 빠졌다고 승패에 상대적이고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대신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팀의 전략이 바뀌고 그에 따라 시즌 성적의 향방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팀이 보유한 자원에 맞는 전략을 최대 효율까지 추구하고, 선수단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게 임무를 배정하고, 부족한 재정 상태로 인해 하부 리그의 선수를 영입하는 것 등은 기존 게임의 룰에 저항해보겠다는 대담한 배팅,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레스터시티는 역사적으로 발군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 시즌 레스터시티의 구단주와 팬들의 목표는 1부 리그 잔존이었지요. 그러나 라니에리 감독은 기존의 선수단과 전략을 고수하여 현상유지만 해도 되는 상황에서 여러 급진적인 처방을 내리게 됩니다. 예상대로 일이 안 풀릴 경우, 바로 본인의 자리까지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감독의 평균 재임기간은 1.5년에 불과하고 실적에 따라 즉시 교체되는 살벌한 EPL 리그에서 말이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스타트업을 위한 교훈 4]
스타트업의 생존과 성장도 결국 CEO의 의사결정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뛰어난 개발자, 뛰어난 마케터가 잠시 회사의 명성을 띄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서서 성장이라는 궤도로 안착시키는 것은 순간 순간 핸들과 레버를 쥐고 운전하는 CEO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CEO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느냐이기 때문이죠. 1987년부터 감독생활을 시작하여 15개의 팀을 맡았었던 라니에리 감독의 예전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방수’입니다. 부진한 팀을 맡아서 강등을 겨우 면하고 바로 경질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 강팀의 부진
이번 시즌에는 유난히 기존 강팀들에게 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강팀들의 주요 핵심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하는 것을 비롯하여, 감독과 선수들의 불화로 인해 팀워크가 와해되기도 하고, 팬들의 거센 야유로 감독과 팬이 대립하기도 합니다. 결국 레스터시티가 아직까지 1위를 수성하는 이유는 기존 강팀들의 부진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안에서 내실을 다지는 것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지만, 상대방이 악수를 두고, 외부 환경이 나에게 우호적일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기회는 기존의 아성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 생기는 법이니까요.
[결론을 내리며]
한국에서는 스포츠에서 약팀의 돌풍을 회의적으로 바라볼 때 사용하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DTD’(Down team is down)라고 하는 것인데, 야구감독인 김재박 감독이 확실한 전력을 갖추지 않으면 당장 순위가 높더라도 결국엔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발언을 하면서 생겼습니다. 과연 레스터시티도 DTD의 전철을 밟게 될까요?
라니에리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단지 선수들과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었다. 레스터시티의 반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다른 차원의 희망이 되고 싶다. 우리는 그 목표를 위해서 한 발짝씩 나가고 있다”는 인상적인 발언을 하였습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동원하는 엘리트 클럽들 사이에서 선전하는 레스터시티처럼, 무한히 도전하며 혁신을 꿈꾸는 스타트업들의 파란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