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자왕은 없다

By 4월 18, 2017VC Insight

[‘철모자왕’이란]

철모자왕(鐵帽子王)은 중국 내에서 핵심 특권층의 대명사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로, ‘강철 같은 특권(모자, 감투)을 세습 받은 권력자’를 의미한다. 청나라 때 황실이 내리는 작위를 뜻하며 품계의 강등 없이 대대로 세습된다. 청나라 300년 동안 철모자왕의 자격을 얻은 곳은 열두 가문에 불과하다. (출처=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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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리즈시절 청나라, 300년 통치의 동력]

청나라 하면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변발을 한 황비홍이다. 그 다음은 말을 잘 타는 기마병 혹은 아주 행동이 거친 병사들이다. 다시 말하면, 문(文)보다는 무(武)에 가까운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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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1/3을 지배했던 청나라 영토와 황룡기 (출처=구글)

 

실제로도 만주족의 뛰어난 기동력과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1616년 태조 천명제(누르하치)가 ‘금’(후금)을 건국하였다. 이를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어 명나라를 물리치고 중국 대륙을 약 300년 가까이 지배하는 왕조를 이룩했다. (출처=위키피디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강력한 ‘군사력’만으로 청나라가 존속 가능했던 것인가? 군사력으로는 명나라를 최초에 어떻게 굴복시켰는지 설명할 수는 있지만, 소수의 만주족이 어떻게 인구가 수백 배에 이르는 한족을 300년간 통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한족의 정치, 군사, 물자, 사상 등을 통제하고 한족 간 서로를 견제하게 하고 이간질시켜 큰 노력 없이 장기간 통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분명 단기간 내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세대의 기간 동안의 지도력을 피지배층 한족의 내부 갈등과 분열로만 설명하기에는 만주족을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지배층 전체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 혹은 내부 원동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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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봉제도]

이에 지배층 내부 동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급 제도 ‘은봉’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이 비록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요인은 아닐지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과 성과중심주의를 지향한 청나라 지배층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이는 생존의 문제를 벗어나 다음 성장을 고민하는 스타트업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은봉’이란 개국공신인 극소수의 가문(‘철모자왕’이라고 함)을 제외하고는 황제와의 친인척 관계로 받은 계급은 다음 세대의 계급이 한 단계씩 격하되는 제도이다. 단순히 부모 세대의 은덕으로 받은 지위와 권력은 일부는 인정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회에 환원한다는 개념이다. 생각해보라.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한 계급을 박탈당하는 것이 어떠할지. 심지어 이들은 황제와 친인척인 아주 높은 귀족이었다.

 

황실의 자손이라도 다음 세대가 부모님 세대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방법은 명확하다.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쌓거나 다양한 방면의 업적을 보여주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세대는 물론이고 후손은 더 안 좋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황실의 친인척이 말이다.

 

현대에는 이러한 정신을 상속세라는 제도가 일부 구현하고 있으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실 친인척의 신분을 세대마다 한 단계씩 격하시키는 제도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 제도는 청나라에 실력과 성과 중심의 생태계를 자리잡게 만든 원동력이자, 소수민족이 초심을 잃지 않고 거대한 한족을 삼백 년 동안 통치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초석이었다고 생각한다.

초원에서 말을 타고 살던 유목민들이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지배층이 되었다. 어찌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지나친 자기 만족은 타락과 방만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생존과 직결될 것임을 경계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 끝에 스스로의 지위와 권력을 제한하는 치명적인 제도이지만, 성과중심의 환경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지배층의 사회적 합의 안에서 ‘은봉’이 탄생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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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금기를 이끈 6대 황제 건륭제 (출처=China Highl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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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에게 던지는 화두]

2015년 3월, 중국의 가장 큰 정치행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의 ‘철모자왕은 없다’는 발언이 크게 회자되었다. 중국의 중앙지도부가 당과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지도부가 갖고 있는 특권을 완화하고 위에서부터 자발적인 혁신을 이루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국이나 거대한 일국을 다스렸던 청나라, 이미 안정적인 사업을 일군 대기업이나 이제 갓 사업을 시작한 스타트업 모두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의 깊이는 다르지 않다. 창업 초기에는 생존이라는 지상 과제 아래 경영진들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후에는 초심을 잃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원동력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를 경영진 각자의 사명감 혹은 개인적인 동기부여로 해결하기에는 많은 이해관계와 변수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각자의 상황에 따라 형태는 다르겠지만, 회사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 규모가 커지고 이해 관계가 많아질수록 회사는 동력을 잃기 쉽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성공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성공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모든 성공이 영원할 수는 없기에 경쟁 및 시장 상황에 맞게 사업을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경영진을 주축으로 모든 임직원에게 지속적인 성장 동력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스타트업이 소중히 일구어낸 작은 불씨가 점차 퍼져 광야를 불태우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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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Choi

Author Jay Choi

2015년 초 소프트뱅크벤처스에 입사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약 3년간 삼성전자에서 재무 업무를 경험했습니다. 기술 혁신을 통한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특히 B2B 분야에서 그 기회를 발굴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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